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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희망의 나라로’를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
현제명과 홍난파
방학진 2004/11/05 10:50    

지난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때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참여정부라는 모토를 살리기 위해 일반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각종 음악과 춤사위가 새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옥의 티랄까 취임식 현장에서 울려 퍼진 노래가 필자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의 눈과 귀를 거슬리게 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로 시작하는 저 유명한 <희망의 나라로>때문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이 노래는 홍난파와 더불어 대표적 친일음악인인 현제명이 작사․작곡한 것이다.

물론 속된 말로 노래가 무슨 잘못이 있겠나하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지만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의 취임식장에서 연주되고 불려지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선곡이었다.
지난 해 철거된 독립기념관의 조선일보 윤전기의 경우처럼 굳이 철거가 아니더라도 그 앞에 자세하게 안내문을 적어 조선일보의 친일행적을 알릴 수도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음악은 한번 연주되어 사람의 귀를 통해 뇌 속에 파고들면 다시 끄집어 낼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도 국가의 가장 큰 행사장에서 일단 연주되고 나면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잘못을 알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글이 부디 국가의전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참고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친일음악인 현제명과 홍난파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 현제명
1902년 대구태생인 그는 1923년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과 1929년 각각 미국과 일본에서 음악유학을 바치고 돌아와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한다. <희망의 노래>는 1931년 ≪창작가요1집≫에 수록된 곡으로 직접적인 친일음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편, 현제명과 홍난파는 양악계의 양대 산맥으로 등장하는데 실제로 두 사람은 [홍 현 양씨 작곡발표회](1933. 10. 29)를 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다. 심지어 일제에 전향서조차 함께 발표할 정도였으니, 이후에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함께 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사상 전향서 발표이후 현제명의 친일행위는 적극성을 띄게 된다.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 1941년 ‘조선음악협회’ 이사, 1943년 경성대화숙 부설 ‘경성음악연구원’ 원장, 1944년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등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그 앞에 열린 것이다. 물론 1937년 중일사변 이후의 정세는 일제가 본토 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을 전쟁에 총동원하던 시기였고 바로 이 시기가 친일파가 대량으로 양산되던 암흑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현제명은 1938년 조선총독부 학부국장이 회장을 맡아 ‘음악을 통해 내선일체를 굳게 하려는 것이 목적’으로 만들어진 ‘경성음악협회’에 간사로 참가하였는데 이 조직은 3년 후 전국단위의 친일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를 조직하기 위한 사전 포석의 조직이었다.

‘조선음악협회’는 출범과 함께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후원으로 1941년 6월 ‘음악보국주간 대연주회’ 개최, 1941년 11월 ‘사은 음악회’ 개최, 1942년 12월 조선군사령부 후원으로 ‘음악경연대회’ 개최 등 그야말로 ‘일본정신을 구현하’고 ‘일본문화의 향상에 기여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음악행사에는 반드시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궁성요배와 묵도, 일본국가 봉창, 일본의 제2국가인 ‘우미유카바’(海行かぼ;바다로 가면) 등이 불려졌다.
당시 玄山濟明(구로야마 사이민)으로 창씨개명한 현제명의 노래가 이 때 많이 불려지기고 했고, 자신이 직접 노래를 하기도 했으며, 경연대회 성악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는 등 다각적으로 친일음악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홍난파가 죽자 이제 그는 양악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대표주자가 되었고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세속적 출세였다.

경성대화숙은 ‘반국가사상을 파쇄격멸하여 황도정신을 진작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 현제명은 그 산하의 ‘경성음악학원’ 원장이 되었는데, 이 단체는 해방 후인 1946년 2월 ‘경성음악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제명은 잠시 ‘교장’이 되었고 이어서 1946년 8월 22일 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의 음악부장(지금의 음대학장)이 된다.

‘황도사상 진작을 목적’으로 하던 ‘경성음악학원’이 해방 된 대한민국 국립 서울대학교의 음악대학이 되었으니 우리는 어디서부터 역사를 계승하고 어디서부터 단절해야 할까. 서울대 음대의 역사는 1946년부터라고 해야 옳을까 아니면 ‘경성음악학원’이 만들어진 1943년부터라고 해야 할까.

음악적 재질 뿐 아니라 현제명은 사업적 수완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일제시대에 승승장구하던 그는 해방이 된 후에도 한국음악원 이사장, 국립극장 운영위원, 서울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 영구회원, 한국 음악협의회 이사장(국제연합 음악협의회 소속),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등 수 많은 직책을 맡았으며 사후인 1965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도 추서되었다.

“일제말기에 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성 후생실내악단]이 조직되어 지방 순회공연을 다녔다”(나운영)고 자신의 은사를 대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의 삶의 궤적으로 보아 그가 바라던 ‘희망의 나라’가 진정 해방된 조국이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히려 <희망의 나라로>는 알본의 제2국가인 ‘우미유카바’(海行かぼ;바다로 가면)에서 느껴지는 음악적 상징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여하튼 그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대외적인 공식행사에 <희망의 나라로>를 부르는 것을 삼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홍난파
<희망의 나라로>처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노래가 홍난파의 경우에는 <봉선화>가 있다.
이 노래는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울 밑에 선 봉선화로 비유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비감에 접어 불러오고 있다. 하지만 이 노래 역시 그렇게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일제시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최한 음악회에서 단골로 불려지기 때문이다.

1942년 6월 11일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열린 공연 프로그램을 보면 일본 국가를 비롯한 국민의례로 시작하고 중간 휴식 전에 <대 일본의 노래>등을 부르고 맨 마지막에 제2일보국가 ‘우미유카바’(海行かぼ;바다로 가면)가 불려졌다.
제2부 두 번째에는 소프라노 김천애(창씨명 : 다쯔미야 텐아이)가 <애국의 꽃>(일본군 종군 간호사의 활약을 칭송하는 일본어 노래)과 함께 바로 <봉선화>를 부르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일본이 주최하는 공연장에서 항일을 소재로 한 노래가 불려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봉선화>는 단지 항일도 친일도 아닌 단순 창작곡이라고 해 두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제명과 달리 森川 潤(모리카와 쥰)으로 창씨개명한 홍난파는 대개 창씨명 속에 자신의 이름의 흔적을 남기는 것과 달리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창씨개명이 친일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홍난파의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희망의 아침>,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등의 친일 노래를 작고한 홍난파는 또한 1941년 불과 45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을 두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 주장 역시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정리되고 있다.

우리는 얼마 전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의 친일행적과 그 노래가 항일과는 무관한 노래임이 만천하에 드러나 그의 이름을 딴 음악관이 마산음악관으로 바뀐 사실을 알고 있다. 아직도 난파 생가에 42억원을 들여 기념관을 지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이 될지 궁금하다.

최근 <망명 음악, 나치 음악>이라는 책을 펴낸 이경분 음악학 박사의 말은 음악이라는 외피를 쓰고 행해진 친일행위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생존을 위협받고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던 그 상황에서 과연 순수예술이 가능한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순수’와 ‘정치’라는 양자택일 중에서 ‘순수’의 선택은 애당초 정치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어요” “독일이 제3제국 멸망 후 수많은 전범들을 처단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어용 음악가들의 경우는 변명할 구실이 많았기 때문에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앞으로 나치 치하와 일제 강점기의 어용 음악인들을 비교하는 연구를 해볼 계획입니다.”(이 말은 한겨레신문 6월 12일치에서 인용)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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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의견 목록
1 . 부끄럽습니다. 초롱이 2004-11-06 / 19:45
2 . 전부 다 한 심한 것이라 생각하오. 스컬러 2010-08-30 /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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