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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진의 민족바로세우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한 안석주
식민지 지식인의 나약함이여
방학진 2005/12/15 16:24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언제쯤 통일이 될지 그리고 그 구체적인 형태가 연방제 또는 연합제로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가끔 통일된 조국은 어떤 깃발과 어떤 노래를 국기와 국가로 할지 궁금해진다. 깃발의 경우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남북한 단일팀이 남북한의 영토를 그려 넣은 단일기를 사용하고 있고 노래의 경우에는 아리랑을 쓰고 있다. 이 아리랑과 더불어 남북한 주민들이 편하게 부르는 노래를 꼽자면 단연 ‘우리의 소원’일 것이다.

△ 남북정상회담 당시 양측 정상들과 수행원들이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고 있다 @인터넷 이미지
이 노래는 1947년 안석주가 가사를 쓰고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 중이던 그의 아들 안병원이 작곡한 것이다. 당시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3·1절 특집 어린이 프로그램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곡의 원래 가사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으로 시작되었다가 이듬 해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노래가 우리들에게 가장 감동을 준 장면은 아마도 2000년 6월 15일 남북한 정상이 합의서에 서명한 후 양쪽 수행원들과 함께 어울려 손을 맞잡고 부르던 바로 그 때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렇듯 남북 모두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예술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은 사정이고 보면 안석주, 안병원 부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2005년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 영화분야에는 안석주의 이름이 올라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에서 태어난 안석주(1901-1950)는 한마디로 식민지 시대를 살다 간 불행한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친일파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골수 친일파들의 경우보다는 안석주와 같이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인물들도 적지 않다. 안석주처럼 망국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한가운데서 고뇌하다 결국 친일로 귀결되고 연이어 분단의 책임까지 감수해야 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 시기에 대부분 친일로 돌아서고 만다. 이 시기를 일러 친일의 경쟁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지식인들의 변절은 열병처럼 퍼져 나갔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지금의 휘문고교) 재학 중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으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졸업 후 1921년 일본의 동경 혼고 양화 연구소에 잠시 유학을 다녀 온다. 그 후 김동성으로부터 만화를 배웠다. 이 시기에 함께 수학한 장발, 노수현, 이상범 역시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해방 후 서울대(장발, 노수현)와 홍익대(이상범) 미술대의 초기 교수진으로서 활동한다. 이후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소설의 삽화를 시작으로 만화와 언론계에도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학지 <백조> 동인 활동과 함께 신극 운동 극단인 <토월회>에서는 무대미술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배우로도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 안석주가 그린 만문만화(오늘날의 시사만화)
두 번째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한 곧 시대일보로 그리고 1928년에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가며 단순히 연재 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수준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상가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만문만화(오늘날의 시사만화)를 연재한다. 1934년 자신의 작품 ‘춘풍’이 영화화되는 것을 계기로 조선일보를 떠나 영화계로 진출하기 까지 그는 만문만화를 비롯해 미술 평론, 소설, 시 등을 통해 식민지 치하에서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었다. 이를 테면 ‘뿌르조아’(조선일보 1929.12.29)라는 만문만화에서는 브르주아를 뚱뚱하고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존재로 조롱하는 데에서는 그의 계급적 입장이 묻어나기도 하며, 일본이 가져 온 근대화 속에서 몸을 제 멋대로 내 던지는 조선 여성들의 모습을 대하면서는 민족적 울분 같은 감정이 자주 전해지곤 한다.

이러한 그의 당시 시각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성한 반일통일전선조직인 신간회 활동이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카프) 활동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의 6인 중앙위원의 한사람이었으며 기관지 삽화를 그리기도 한 그는 ‘잡문을 많이 쓴다’는 이유 등으로 1931년 카프에서 제명당하고 만다. 제명까지 당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자유분방함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1934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기 전까지 나름대로 식민지 현실에 고뇌하던 안석주는 영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점점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1935년 영화 ‘춘향전’을 감독하고 몇 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그는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고 이윽고 ‘지원병'과 ’조선에 온 포로'는 친일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만들게 된다. 1940년에 일본 황실의 도를 따른다는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는 한편 1941년에는 친일어용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황도학회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가입한 조직으로 이른바 ‘내선 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황도 사상의 학습, 보급 그리고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 방책으로 하는 노골적인 친일단체였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위한 세기적 대전환기에 필요한 신시대의 대중교양’을 표방한 친일잡지 ‘신시대’의 1941년 4월호와 5월호 표지 그림을 그린다. 특히 4월호 표지 그림 ‘묵도’는 농사일을 마친 젊은 남녀가 황혼을 향해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하는 모습으로 유명한 밀레의 ‘만종’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기도의 대상은 천황일 것이다.

△ 1941년 안석영(안석주의 예명)이 연출한 친일 영화, 지원병의 한 장면

해방을 맞은 후 1950년 2월 병으로 죽기까지 안석주는 다양하고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우선 언론분야에서는 일제시대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학예부장 등의 경력으로 말미암아 1946년 중앙일보 고문, 1947년 민주일보 편집위원 겸 문화부장, 1948년 문화시보 창간 사장에 취임하였고 문화분야에서는 해방 직후 대한영화사 이사장을 비롯해 좌익 문화단체들이 연합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대항해 1947년 2월 출범한 우익 문화단체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에 참석한다. ‘우리의 소원’을 작사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1949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과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그 밖에 서울시 예술위원 문화위원, 문교부 예술위원, 국립극장 위원 등을 지냈다.

안석주가 만약 한국전쟁을 맞았다면 과거 카프 경력이 어떻게 작용했을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는 50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간 덕분에 그의 존재는 물론 그가 저지른 친일 경력은 세인들의 관심권 밖에서 맴돌 뿐이었다. 어쩌면 안석주는 해방 후 자신이 범한 친일 행위를 반성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저버리고 제자들로부터 강력한 경호를 받고 있는 젊은 시절 동료들인 장발, 노수현, 이상범보다는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남북 교류의 상징적인 노래가 된 ‘우리의 소원’을 부를 때마다 식민지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끝까지 자신의 지조를 지키지 못한 나약한 천재 안석주를 떠올리며 그가 그토록 소원이라던 독립은, 그리고 통일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더불어 지금의 한국 영화인들은 제국주의를 그대로 빼닮은 헐리우드의 무차별 공세에 맞서 당당하게 우리 영화를, 우리 문화를, 우리 역사를 지켜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인가.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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